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스비에른 할보르센 (문단 편집) == 뒷이야기 == * [[함부르크 SV]] 시절 동료였던 툴 하더와 선물도 교환하는 등 선수 시절에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. 그러나 둘의 정치적 성향은 정반대였는데 하더는 독일의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[[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|나치]]가 독일의 정권을 잡기도 전인 1931년에 이미 나치당원이 되었다. 반면 할보르센은 1940년대에 [[노르웨이]]에서 반나치 활동에 앞장섰다. 나중에 할보르센이 수용소에서 해방되어 노르웨이로 돌아갈 때 [[함부르크]] 외각의 노이엔감머(Neuengamme)에 잠시 들렀는데 이곳에서 그는 하더와 재회할 수 있었다. 하지만 이때의 하더는 노이엔감머에서 간수로 일하다 [[전범]]으로 기소되어 있는 상태였다. 그들은 1953년에 [[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|노르웨이]]와 [[독일 축구 국가대표팀|서독]]이 [[1954 FIFA 월드컵 스위스/지역예선#s-2.1|1954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]]을 치르고 나서 열린 연회장에서 다시 만났는데 화해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.[* 당시 서독의 감독 [[제프 헤어베어거|제프 헤르베르거]]는 할보르센을 이 연회장에서 만나고 그에게 전쟁 당시 독일의 비인간적 행태에 큰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.] 하더도 1956년에 할보르센의 뒤를 따르듯 사망했다. * 할보르센이 나츠바일러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시절, 후에 노르웨이의 총리가 되는 [[트뤼그베 브라텔리]]가 그의 동료였다. 브라텔리가 건강 악화로 생명이 경각에 다다랐을 때 임시 휴가와 의사를 구해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. 후에 브라텔리는 이 수용소를 "수감자들이 외부 세계와의 모든 접촉을 차단하는 것이 목적인 수용소, 굶주림과 비인도적인 대우로 죽을 수용소"라고 묘사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